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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라는 이름과 관련해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혁명 당시 시민들이 부르던 노래 중 “자유 평등 박애”라는 가사가 있었다. 이때 한 사람이 ‘박애’ 대신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라고 바꿔 불렀다. 그러자 군중들은 환호했고, 결국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수립되었다. 이후 황제 자리에 오른 나폴레옹은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수많은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있어서 진정한 의미의 자유란 없었다. 오히려 독재자로서의 삶만을 살았을 뿐이다.

나폴레옹
나폴레옹

 

 

 

 

 

나폴레옹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왜 그렇게 많은 명언을 남겼을까요?

 

그는 1804년 쿠데타를 일으켜 제1통령이 된 후 종신 통령으로서 국정 전반을 장악했다. 그리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유럽 대륙을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영국과의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배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때부터 정치적 재기를 도모했으나 실패하였고, 엘바 섬 유배지에서 탈출하였으나 워털루 전투에서 패함으로써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폴레옹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말들을 남기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어떤 인물인가요?

 

나폴레옹은 1769년 8월 15일 코르시카섬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죠세핀 보나파르트는 귀족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농민이었던 어머니 마리 루이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 잦은 병치레를 했다. 어릴 적부터 허약체질이었던 나폴레옹은 학업 성적 또한 좋지 않았다. 게다가 열네 살 무렵부터는 몸이 자주 아팠는데, 특히 결핵성 뇌막염 후유증으로 평생 두통에 시달렸다. 청년시절인 1789년 5월 25일 파리시민혁명이 일어나자 고향 친구이자 법률가인 탈레랑 백작의 권유로 입헌군주제 지지 연설을 하면서 정계에 입문하게 되었고, 10월 2일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1792년 6월 21일 이탈리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9월 11일 프랑스로 귀국하자마자 총재정부로부터 루이 16세 처형 등 일련의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체포되었으나 며칠 만에 석방되었다. 같은 해 12월 4일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가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을 격파하였으며, 이듬해 1월 프로이센·오스트리아와의 휴전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를 계기로 정권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헌법을 제정하고 행정기구를 개편했으며, 군사제도를 개혁하는 등 여러 가지 제도개혁을 단행하였다. 이어서 1800년 7월 14일 조세핀과 결혼식을 올렸고, 그해 11월 로마 교황으로부터 대관식을 받았다.

 

 

 

 

 

 

 

 

 

나폴레옹은 어떻게 러시아원정을 떠나게 되었나요?

 

1812년 초 나폴레옹은 모스크바 공략을 명령받았다. 이미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겨울전쟁(Winter War)에서의 승리 경험을 믿고 강행한다. 결과는 참담했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사기가 바닥이었고,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퇴각조차 여의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까지 돌았다. 결국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서야 겨우 후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최악의 패전이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었고, 점점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역사 속 위대한 영웅으로만 알았던 나폴레옹에게도 어두운 면이 있었네요. 지금부터라도 잘못된 행동은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